"삼성에 폭탄 투하"…수천억 손해 끼친 브로드컴, '갑질' 과징금 고작 '191억'
공정위, 불공정 수단 동원 계약 강제 혐의로 브로드컴에 '철퇴'…자진시정안 '기각'
삼성전자, 브로드컴 강요에 3억2630만 달러 피해…조만간 손해배상 소송 나설 듯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전자에 스마트폰 부품 구매 장기 계약을 강제한 혐의를 받는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에게 철퇴를 가했다. 브로드컴이 당초 200억원 규모 상생기금안을 제시하며 자진 시정 방안을 내놨지만, 갑질을 당한 삼성전자가 반대하고 나서자 이를 기각하고 제재에 나선 것이다.
공정위는 브로드컴이 부품 선적 중단 등 불공정한 수단을 통해 삼성전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부품 공급에 관한 장기계약(Long Term Agreement, LTA) 체결을 강제, 불이익을 제공한 행위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19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고 21일 밝혔다.
◇삼성에 수천억 피해 준 브로드컴, '갑질' 인지했다
브로드컴은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스마트 기기의 핵심 부품인 RF 프런트엔드(RFFE), 와이파이(Wi-Fi), GNSS(위성항법시스템) 등을 공급하는 회사다. 2020 회계연도 기준으로 순매출액이 약 239억 달러(약 28조7636억원)다.
공정위에 따르면 브로드컴은 경쟁사를 배제할 목적으로 삼성전자 등 국내 스마트 기기 제조사에 불리한 내용의 3년 장기 독점 계약 체결을 강요한 혐의를 받는다. 기간은 2020년 3월 27일부터 2021년 7월 2일까지로, 삼성전자가 스마트기기 부품을 매년 7억6000만 달러 이상 구매하도록 강제했다. 사실상 삼성전자의 계약선택권을 제한하고 경쟁업체의 진입을 막은 셈이다.
공정위는 2020년 브로드컴의 경쟁사인 미국 반도체 기업 퀄컴의 신고로 이 사건 조사에 착수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당시 삼성전자와 애플은 프리미엄 스마트기기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이었다"며 "삼성전자 등은 고가의 프리미엄 스마트기기에 탑재되는 최첨단, 고성능 부품의 대부분을 브로드컴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2018년부터 일부 부품에서 경쟁이 시작되자 2019년 12월 삼성전자가 경쟁사업자로 이탈하지 못하게 하고, 장기간 매출을 보장 받고자 브로드컴은 사전에 치밀한 검토를 거쳐 독점적 부품 공급상황을 이용한 LTA 체결 전략을 수립했다"며 "삼성전자는 그 때 부품 공급선 다원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LTA 체결 의사가 전혀 없었고, 기회비용 및 심각한 재정손실 등을 이유로 브로드컴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거부했다"고 덧붙였다.
공정위에선 브로드컴이 2020년 2월부터 삼성전자에 대한 부품 구매주문승인 중단, 선적 중단, 기술지원 중단 등 일련의 불공정한 수단을 동원해 LTA 체결을 압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삼성전자가 부품공급 다원화 전략에 따라 경쟁사업자의 부품을 일부 채택하자, 브로드컴은 해당 경쟁사업자를 '증오스러운 경쟁자(hated competitor)'라 칭하며 삼성전자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부품 공급이 갑자기 끊기면 완제품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던 탓에 브로드컴의 요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할당량을 채우려고 부품을 과다 구매했을 뿐 아니라 장기간 다른 경쟁사 부품을 이용하지 못하고, 남은 부품은 악성재고로 떠안게 됐다. 이에 따른 피해액은 수천억원대로 추산됐다.
공정위 관계자는 "브로드컴은 당시 삼성전자에 취한 '구매주문승인 중단, 선적 중단' 조치에 대해 스스로 '폭탄 투하', '핵폭탄'에 비유했다"며 "'기업윤리에 반하는', 삼성전자에 대한 '협박'이라고도 생각하는 등 삼성전자가 심각한 상황에 처할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삼성전자는 당시 브로드컴의 선적 중단 등의 조치로 인해 협상에서 매우 불리했고, 브로드컴의 일방적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있었다"며 "'생산라인에 차질이 우려된다', '가진 카드가 없다', '브로드컴이 급한 게 아니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라는 메일 내용에서도 삼성전자의 상황이 드러난다"고 덧붙였다.
브로드컴에 의해 강제된 이 사건 LTA를 이행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당초 채택했던 경쟁사 제품을 브로드컴 부품으로 전환했다. 또 구매 대상이 아닌 보급형 모델에까지 브로드컴 부품을 탑재하고 다음연도 물량을 선구매하는 등 가용 수단을 총동원해 8억 달러의 부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2021년 출시한 '갤럭시 S21'에 당초 경쟁사업자의 부품을 탑재하기로 결정했으나 결국 이를 파기했다. 브로드컴의 것을 채택할 수밖에 없는 등 부품 공급 다원화 전략을 지속하기 어려웠고, 선택권도 제한됐다. 또 브로드컴의 부품은 경쟁사업자보다 비싸 단가 인상으로 인한 금전적 불이익도 발생했다.
LTA로 삼성전자의 부품 선택권이 제한되면서 브로드컴의 경쟁사업자들도 제품의 가격과 성능에 따라 정당하게 경쟁할 기회를 빼앗겼다. 장기적으로는 부품제조사의 투자 유인이 없어져 혁신이 저해되고, 소비자에게 피해가 전가될 상황을 초래했다.
공정위는 이 같은 브로드컴의 행위가 '거래상대방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행위'에 해당된다고 봤다. 또 반도체 등 핵심 기반 산업 분야에서의 불공정행위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위법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 나가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공정위 관계자는 "이번 조치는 브로드컴과 같은 반도체 분야 선도기업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거래상대방에게 불이익을 주고, 관련 시장에서의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를 억제함으로써 기술혁신의 핵심 기반 산업인 반도체 시장에서의 공정한 거래질서를 확립하고 경쟁 여건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시장은 스마트기기, 자동차, 로봇, 인공지능(AI) 등 전방산업 및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등 후방산업과 긴밀하게 연계돼 상호작용한다"며 "이러한 점에서 이 시장에서의 공정한 거래질서 회복은 연관 시장에까지 파급효과가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조치가) 더욱 의미를 가진다"고 자평했다.
◇브로드컴 '200억 상생기금' 꼼수 안통했다…삼성전자, 소송 나설 듯
브로드컴은 이번 공정위 제재를 피하기 위해 당초 200억원 규모 반도체 상생 기금 조성을 골자로 하는 동의의결안을 마련했다. 동의의결은 사업자가 제안한 시정방안이 타당하다고 인정되면 조사 중인 사안이라도 법 위반 여부를 확정하지 않고 사건을 신속하게 종결하는 제도다.
최종 동의의결안의 시정방안은 '행위중지 등 경쟁질서 회복을 위한 시정방안'으로서 불공정한 수단을 이용한 부품 공급계약 체결 강제 금지, 거래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부품 선택권 제한 금지, 공정거래법 준법 시스템 구축 등으로 구성됐다. '거래질서 개선 및 중소사업자 등 후생 제고를 위한 상생방안'으로서 반도체·IT 산업 분야 전문인력 양성 및 중소사업자 지원(200억원), 삼성전자에 대한 품질보증 및 기술지원 확대 등으로 구성됐다.
당초 브로드컴은 혐의를 부인하는 모습도 보였다. 지난 6월 7일 동의의결안 인용 여부를 심의하는 전원회의에서 "브로드컴은 삼성의 위탁을 받아 부품을 제조하는 기업으로서 오히려 '을'의 지위에 있었다"며 "삼성전자와의 계약은 상호 이익을 위해 선도적 사업자끼리 맺은 계약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삼성전자는 '자사 피해 구제가 미흡하다'며 브로드컴의 동의의결안을 두고 강하게 반대했다. 이에 공정위는 지난 6월 동의의결안을 기각하고 제재를 위한 심의 절차를 재개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과징금을) 맥시멈 부과해도 200억원을 넘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피해보상도 직접적으로 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닌 만큼, 이후 삼성전자에서 알아서 피해보상 구제를 받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측은 브로드컴이 강요한 장기계약으로 3억2630만 달러(약 4337억원)의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공정위의 제재를 근거로 조만간 브로드컴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설 것으로 봤다.
공정위는 이번 결정에 따른 미국과의 통상 마찰은 우려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신고인 자체가 퀄컴"이라며 "미국 회사가 신고했기 때문에 통상 마찰 여지는 사실 없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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